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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노래, 이슬아 : 그녀의 글은 수채화 같다.

by 알로네 2022.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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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노래

이슬아

 

 

'어떻게 하면 감탄을 멈출 수 있을까?'

호들갑일 수도 있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닫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이다. 아니나 다를까 서평을 쓰려 다시 앞페이지부터 살펴보니, 수록되어 있는 단편마다 최소 5개 이상 밑줄을 그었다.

어떤 문장은 멋이 있어서,

어떤 문장은 기억하고 싶어서,

어떤 문장은 먹먹해서,

어떤 문장은 공감해서,

어떤 문장은 배우고 싶어서,

어떤 문장은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어서..

모든 밑줄에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들을 한번더 떠올리며 문장들을 참 오래 바라봤다.

이 책은 그런 힘이 있었다.

문장에도 색깔이 있는걸까?

이슬아 작가의 글을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지은 문장들은 다채롭다. 그 색감은 선명한 컬러감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꼭 물을 많이 먹인 수채화 같다. 맑고 연한데, 한번 닿으면 마음에 오래 번진다.

 

뿐만 아니라 이슬아 작가의 문장에는 어떤 무게감이 느껴진다. 반짝 반짝 빛나는 재능의 무게라고 여겼는데 얼핏 한 장면이 스친다.

빛을 뿜어내는 모니터 앞에서 홀로 시간을 보낸 그녀의 모습.

아무래도 나의 찬사와 감탄은 그녀가 견딘 시간을 향해 보내야 할 것 같다.

 

 


 

밑줄 그은 문장들

향자는 리듬을 너무 잘 타는 나머지 박자를 무시하고 불러도 결코 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정박을 타는 것쯤은 일찌감치 마스터한 뒤 엇박의 세계에서 편안하고 자유롭게 놀았다. 그에 비해 나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정박적인 인간이었다. 학교에 안 늦고 숙제도 잘해 가는. 긴 일기를 날마다 성실히 쓰지만 갑자기 삼행시를 시키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정박 노래는 결코 안 틀리는데 엇박 노래는 꼭 한 군데씩 틀리는. 혼자 걷다가도 스텝이 꼬여 넘어지고 마는...

(...) 엇박적인 사람이란 정박과 엇박 모두를 가지고 노는 이를 뜻했다.

어른이란 이런 것이구나. 뭔지 모를 문제로 애를 태우는 사람들. 슬프고 진지한 말을 방방 뜨는 비트에 맞춰 흥겹게 불러 버리는 사람들. 나는 어둡고 습한 방에서 성인가요를 잠자코 흡수했다. 아이는 어쩜 그리도 어른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가장 많이 자라는지. 교육이란 건 어쩜 그리도 의도치 않게 일어나는지. 어른들이 나를 깜빡 잊은 사각지대에서 노래가 내 몸과 마음과 영혼에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무대에 서서 뭔가를 잘한다는 건 내 몸 주변으로 아주 따뜻한 원을 크게 그려나가는 일과도 비슷했다. 저 뒤에 앉은 사람에게까지 확실하게 닿는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는 작업이자 말과 노래의 부드러운 파장으로 행복한 막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 나는 진정한 벽이 뭔지 모르고 진정한 노래가 뭔지는 더더욱 모르지만, 어떤 경지에 오른 사람이 자기가 배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아주 약간의 용기만 내는 순간을 종종 봐왔다. <불후의 명곡>에 출연하여 <슬픈 인연>을 부르는 강부자의 모습이나, 노래 교실에서 홀로 우뚝 서서 시범을 보이는 나의 향자의 모습에서 말이다. 그 모습에 '통달'이라는 말을 바쳐도 좋을 것 같다. 할머니들에게는 어떤 비결이 있는가. 세월이라는 비결 말고 또 어떤 비밀이 있는가. 어떤 노인들의 탁월한 노래는 왜 어떤 아이들의 탁월한 노래와도 닮아 있는 것인가.

이 책의 담겨 있는 전 편이 다 좋았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여운이 긴 글이 있었다. 바로 <앞으로 걸으니 바다가 가까워졌어>이다. 읽고 나니 마치 그들과 함께 바다 수영을 한 것 같았다. 동동 내 몸을 바다에 띄웠다가 저자가 친구를 보며 바닷물에 눈물을 씻은 것처럼 나도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녀의 사려 깊은 시선 덕분에 한 인물의 삶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고, 이 생생한 감각이 놀라웠다.

삶을 고요히 견디는 사람의 얼굴을 안다. 내 친구 현희진의 얼굴이 때때로 그렇다. 현희진은 대체로 입을 다물고 있다. 표정 변화도 크지 않다. 그저 등을 바르게 편채 일을 하고 책과 세상을 번갈아 응시한다.

(...) 뭔가를 티 나게 원하는 현희진의 모습을 본 건 이때가 처음이라 나는 조금 놀라며 서울행 기차표를 곧바로 취소했다. 내 마음속 현희진은 삶에 바라는 것이 적은 사람이었다. 그는 말간 얼굴로 시를 쓴다. 꼭 할머니들같이 잠이 적어서 아침 일찍 눈을 뜨고는 세수하기 전에 끄적인다고 들었다. 그렇게 쓴 글이 현희진의 방엔 넉넉히 쌓여 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살아가는 걸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만이 우리 사이를 드나들었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살아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저 운이 좋았던 것뿐일지도 모른다. 가만히 누워 현희진이 겪어온 험한 일들을 생각했다. 겪지 않기를 선택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적어도 돈을 가진 어른이 될 때까지는 못 벗어나는 일들이었다.

(...) 나는 맞은 적도 없고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적도 없고 가족을 버린 적도 없다.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떠난 적도 없고 아주 혼자였던 적도 없고 모든 걸 멈추는 게 나을 만큼 괴로웠던 적도 없다. 그래서 사는 게 좋았나. 삶에게 많은 걸 바라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성큼성큼 다가가고 좋은 것을 기대하고 크게 웃고 크게 울고 크게 다짐하고 다시 시작하는 건 그래서인가. 첫 번째 생을 사는 동물처럼. 덜 알아서 덜 고단한 아이처럼. 누구나 그런 새살 같은 마음으로 살지는 않을 것이다. 스물다섯 살인데 이백오십 년은 산 것처럼 지친 사람도 있다. 현희진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살아가는 걸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구나.

이 편은 우정에 관한 짧은 소설을 읽은 기분이었다. 단단하고 슬픈.

최근에 읽은 글 모두를 통틀어 가장 인상 깊었던 엔딩 부분이라 발췌를 남기며 서평을 마무리해본다.

우리 중 가진 물건이 가장 적고 우리 중 가장 비굴하지 않은 한 사람. 주어지지 않은 삶을 바라지 않는 연습을 꾸준히 해왔다고, 연습이란 말에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현희진은 예전에 나한테 말했었는데. 이제 나는 그가 다른 연습에 더 익숙해지기를 소망했다. 바라는 연습. 많이 바라면서 계속 사는 연습. 그리고 나에겐 다른 연습이 남아 있었다. 더 친구가 되는 연습. 갈수록 더욱더 친구가 되는 연습. 사실은 친구가 되는 일만이 내게 남은 전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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