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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까북스

내리막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제현주

by 알로네 2022.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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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커버 에디션

 

 

내리막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제현주

기존의 생업을 내려놓고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는 나에게 꼭 필요한 매뉴얼이었다.

오랫동안 이어온 업무에서 왜 그토록 염증을 느꼈는지, 그럼에도 왜 섣불리 도전을 결정할 순 없었는지 과거의 나를 이해하게 도와주었다. 뿐만아니라 일에 대해 추구해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든 책이었다.

기억하고 싶어 저자의 핵심 메시지를 정리해 보았다.

1) 일에 대한 '나의 욕망'을 구별할 것.

- 좋아하는 일을 둘러싼 '조건'을 파악해야 함.

- 좋아하는 것이 모호하다면 '싫어하는 것' 파악

2) 자신의 욕구에 맞게 삶을 재편하려면 '다른 장소'와 '다른 관계망'안으로 들어가라.

3) 스스로 '일'이라 말할 수 있는 비생산적 '딴짓'을 시도해 보라.

- '돈벌이의 일'이 아니라 '재미', '만족감','배움'의 일이라는 목적으로.

4) 일에 대해 비슷한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과 협동조합을 만들어보라.

- 정서적 만족이 가능한 자발적 플랫폼은 '나' 그리고 '나의 일'에 대한 새로운 정체성이 된다.

5)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 중 하나만 맹목적으로 좇지 말고 긴 시간을 들여 '균형'을 찾을 것.

- 좋아하는 일을 이상화해서 집착한다면, 자칫 변화를 놓칠 수 있다. 열정은 반드시 유효기간이 있다.

쓰고 보니 하고 있는 생업을 놓고 새롭고 도전적인 일을 모색하라라는 위험한 메시지처럼 보이는데 핵심은 결코 그것이 아니었다.

무모한 퇴사를 종용하기보다는 월급과 적성 사이에서 어떻게 안전하게 줄타기를 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일러주고 있는 셈이었다.

초판이 2014년인데 8년이 지난 지금은 이처럼 실행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N잡러 열풍이 좋은 예일 것이다. 본업과 부업이 이제 당연한 시대. 나도 이 흐름을 좇으려 애쓰다 잠시 멈춰보니 이제야 보이는 게 있다.

나의 본업에는 '재미'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눌러놓은 욕망(성취, 만족, 성장 등)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어 '전향'에 도전했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알고 있다. 적성에 딱 맞는 일은 있을 수 없음을. 저자가 말했듯 좋아하는 일을 하는 환경 속에는 '싫은 조건'은 언제나 다양하게 펼쳐져 있음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고 나서 나의 멈춤을 더욱 지지하고 싶어졌다. 앞으로의 방황과 딴짓에 스스로 다른 이름을 붙이는 연습이 될 거라 믿기 때문에.

 

 

*인상 깊은 문장들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랑의 상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듯, 일이 놓인 조건을 직시해야 한다. 일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큰일 날 것 같은 집착 또한 버려야 한다. 그런 집착은 일하는 우리를, 그리고 결국은 일 자체까지 망치기 마련이다. 언제고 떠날지 모르니, 발을 반쯤만 걸친 태도도 답은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일이 주는 최고의 재미를 맛보지 못한다. 마음껏 사랑할 것, 그러나 객관성을 잃지 않을 것, 그 일이 아니더라도 어디서건 의미 있는 일을 또 찾을 수 있다고 믿을 것, 일의 성패가 당신의 가치를 말한다고 착각하지 않을 것.

하고 싶지 않은 업무를 대충 하더라도 생계를 유지하며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위의 문장처럼 '발을 반쯤 걸친 태도'로 말이다. 하지만 8년을 하고 나니 깊은 환멸감을 느꼈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일하며 보내는데 조금의 감흥 없이 시체처럼 지내야 하는 나를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오해하고 있는지 모른다. 원하는 대로 일할 수 없다고 고민하기 전에 자신이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우리에겐 자신의 욕망을 이해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걸음마를 떼는 아기처럼 차근차근 연습해나가야 한다. 내 안의 욕망들을 하나하나 짚어보며 그 욕망들의 우선순위를 이해해야 한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조금씩이나마 자유로워진다. 그렇게 자신만의 우선순위에 따라 스스로 '나의 일'을 정의하는 데서부터 우리는 조금씩 내 일의 주인 자리에 가까워진다.

이 문장을 읽고 일하는 환경에 대한 나의 호불호를 막무가내로 적어보았다. 적고 보니 역시 나는 개인적인 작업 환경을 선호한다는 걸 다시 인지했다. 급하게 적어서 리스트가 빈약한데, 이렇게 나의 욕망들을 구체화시키는 작업은 수시로 필요해 보인다.

Want
Don't Want
조용하고 혼자 일할 수 있는 장소
잦은 대면 소통
(집중을 방해하는 스몰토크)
성장하고 있다는 가시적인 감각(포트폴리오 형태로)
야근과 열정 페이
자발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환경
성취감 없이 바쁜 것
관성적인 업무 처리

우리는 "어떻게 일하고 싶은가"라는 문제를 훨씬 더 정교하게 구성하게 된다. 무슨 일을 어디서 누구와 얼마나 오랫동안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 재미있는 일을 원한다면 나는 어떤 것에서 가장 큰 재미를 느끼는가? 나는 어떤 상황을 가장 견딜 수 없어하는가? 돈을 벌어야 한다면 얼마를 벌어야 하는가? 나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째서 그것을 가장 가치 있게 생각하는가?

그 해답은 우리의 일을 재구성할 것이고, 일이 재구성되면 필연적으로 삶이, 삶이 놓인 관계망이 재편될 것이다.

스스로에게 묻고 반드시 답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리를 해보려고 위의 질문들을 노션에 기록해놓았다.

 

저비용 구조로 자신의 욕구를 재편하고 싶다면 다른 장소와 다른 관계망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일상에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는지. 어떤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지가 우리 욕구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 다른 종류의 활동을 하고, 다른 종류의 관계를 맺고, 다른 종류의 경험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다른 종류의 욕구가 생길 리 만무하다.

이 대목에서 깊이 공감했다. 다른 일을 하고 싶은데 무엇을 할지 몰라 우선 플래너를 작성하고, 티스토리에 포스팅을 하고 브런치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과연 내가 책과 글에 대한 새로운 욕구를 품었을까. 어설픈 그 경험들이 모이자 흐릿해도 가고 싶은 길이 보였던 것 같다.

돈벌이라는 목적에 딱 필요한 만큼만 일을 추구한다면 우리의 일은 점점 더 빛을 잃어갈 것이 뻔하다. 일은 즐거운 활동이 될 수도, 스스로 뿌듯함을 느낄 정체성이 될 수도 없다. 역량을 키울 수 있는 배움의 장이 될 수도, 사회에 의미를 보태는 공헌이 될 수도 없다. 그러면 이런 무수한 다른 욕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일이 돈벌이로 전락할 사회에서 그 모든 다른 욕구가 돈 쓰기에 쓸어 담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돈을 벌지 못한다면 돈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하여 결국 돈벌이를 하지 못하면 다른 욕구도 채울 수 없게 된다.

항상 의아했다. 리프레시를 목적으로 길게 여행을 다녀온 친구들이 다시 출근해 회사일이 하기 싫다고 말하는 모습을 볼 때면 나는 혼자 이런 의문을 품곤 했다.

'일이 재밌을 수는 없을까?'

'일을 잊으려 떠나는 게 아니라 놀듯이 일하는 사람도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이 답을 알고 싶어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일의 고통을 잊기 위해 보상적으로 돈을 쓰는 나 자신이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성과에 가격표를 붙일 수 없어도 내가 느끼는 재미와 의미만으로도 족한 일, 그런 일에 알아주는 이 없는 공을 들이는 것이 즐거웠다. 회사 일이 주는 재미와 의미로 충분했다면 좋았겠지만 그런 상태는 불행히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매일 최소한 여덟 시간을 보내는 직장에서의 일이 어느새 그저 돈벌이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늘 '돈 안 되는 짓', 그렇지만 재미있는 짓을 한두 개쯤 만들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직장인이기를 멈추기로 마음먹은 순간 이왕 어딘가에 공을 들일 거라면 그게 곧 일이면서 놀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과 놀이를 가르는 세상의 기준에 갇히지 않기를 바랐다.

열심히 돈을 번 다음 놀려고 돈을 쓰느니, 그냥 돈은 덜 벌리더라도 놀이 같은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결국은 더 나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저자는 회사에 다니던 시절부터 '돈 안되는 짓'에 공을 들였다고 한다. 철학 세미나에 열을 올리려고 학교 다니던 때보다 더 책을 파고 사나흘을 꼬박 투자해 글 한편을 완성하기도 했다.

물론 저자는 나와는 살아온 배경이 다른 사람이다. 엘리트 코스라 느껴질 정도로 좋은 학력과 커리어를 가진 인물이지만 그녀의 바람, 즉 덜 벌더라도 놀이 같은 일을 희망하는 건 나 또한 깊이 공감하는 바였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능력이 있고, 각기 타고난 능력의 종류 자체가 다르다. 누가 누구보다 능력이 좋거나 나쁘다는 판단에는 능력의 종류 자체에 대한 선호가 바탕에 깔려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능력주의는 능력이 더 뛰어난 사람을 높이 산다기보다는 시장이 원하는 종류의 능력을 가진 사람을 높이 사는 방식으로 작동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런 능력주의가 정말 '공정한'것일까? 부모의 재력을 물려받아 유리한 것은 비난하면서 시장이 원하는 능력을 타고나 유리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더구나 능력은 설사 유전자의 덕이 아니더라도 운 좋게 누린 양육 환경 덕이기도 하다.

개인의 능력이 좋아서 인정받는 게 아니라 시장이 원하는 종류의 능력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공정한 평가일 수 없다는 주장이 인상 깊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도 괜찮아라는 자신감만이 비빌 언덕이다. 미래를 확신하는 착각도, 예측 불가능성에 안절부절못하는 소심함도 낙제점이다. 준거점 없음을 준거점으로, 정박지 없음을 정박지로 삼아야 하는 아이러니. 그 아이러니를 감싸 안지 않고서는 살아갈 도리가 없다.

결국 저자는 미래를 알 수 없지만 정박지를 기대하진 말고 자신감 있게 표류하며 살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여러 가능성을 동시에 상상하고 그것에 몸과 마음을 대비시키는 것.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자신의 과거와 연결되는 하나의 서사 속에 통합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다.

그리하여 나는 누구인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나는 이 모든 일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발견할 것인가를 물어야 할지도.

결국 내가 했던 업무와 딴짓, 비생산적인 작업 등이 한 데 어우러져 '나만의 스토리'가 될 것이라는 의미.

결국 변화를 감행하는 사람들은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무지한 용기'를 의지로 포장하여 장애물을 뚫어내겠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다른 하나는 목적지가 어디가 될지는 몰라도 일단은 출발하겠노라는 사람들. 이른바 '아님 말고'의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이다.

어느 쪽도 될 수 없으니 변화를 감행하지 않겠다고? 그렇다고 변화를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리스크가 곳곳에 도사린 사회에서 선택지는 둘뿐이다. 리스크가 닥칠 때까지 기다리겠는가, 아니면 리스크를 스스로 감수하겠는가.

나도 후자에 해당할 것이다. 목적지를 정해두고 시도하기보다는 나의 흥미에 귀 기울이며 유랑하듯 움직일 테니까.

(...) 처음에는 그 여유를 즐겼다. 그렇지만 그 상태로 시간이 조금 흐르자 오히려 통제력을 잃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이 없음에도, 정해진 시간 동안 정해진 장소에 내 몸을 가져다 둬야 한다는 사실이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나는 내 일의 대가를 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 시간을 판 대가, 즉 내 자유의 일정 부분을 포기한 대가를 받는 사람이었다. 그 둘은 스스로 내 일상을 통제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였다. 내 자유에 아무리 비싼 값이 매겨진다 해도 그걸 팔아서 살고 있다는 실감은 뼈아팠다.

여유가 있는데도 내 삶의 통제력을 잃었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대목에 공감했다. 내 몸값은 곧 자유의 값이며, 이게 아무리 높아져봤자 자유를 뺏기기에 만족할 수 없다는 씁쓸한 현실.

현재를 견딤으로써 미래에 더 큰 과실을 누리라는 교훈은 안정적 토대 위에서만 빛을 발한다. 오늘의 만족을 뒤로 미루는 것은 언젠가 더 큰 대가로 돌려받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을 수 없는데도 현재를 희생한다면 그것은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다. 내가 놓인 환경의 어떤 측면도 견실히 지속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는 시대, 오늘을 견디라고 부르짖는 노동 윤리는 결국 당신의 뒤통수를 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지연된 만족에 이자를 붙여 돌려줄 것을 약속하지 않는다.

마시멜로 이야기라는 책이 한때 베스트셀러였는데, 이제는 지연시킨 만족이 반드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게 시대가 아니다.

세넷은 "자기에게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을지라도 뭔가를 제대로 해낸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장인 정신의 요체"라며 "자신의 이해득실을 초월한 그러한 헌신만이 사람들을 정서적으로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 우리는 일의 대상에 순수한 애정을 기울이면서도 여전히 대상이 놓인 맥락과 판을 이해하고 계산하려 애써야 한다. 일에 헌신하되, 우리는 기꺼이 이해득실을 따져보아야 한다.

(...) 돈벌이의 셈법과 놀이의 셈법, 공동체의 셈법 사이에서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셈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 자기만의 셈법 위에서 이뤄지는 헌시만이 새로운 방식의 장인 정신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 시장 사회가 규정하는 행복을 순순히 받아들인다면 행복은 요원하다. '나'의 행복을 구성하는 요건을 치열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 부분이 핵심 메시지 중 하나일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정서적 만족감을 주는 장인의 길로 가면서도 이해득실을 완전히 놓지 않는 것. 일에서 행복할 권리를 찾으려면 '나의 행복 조건'을 치열하게 생각할 것.

앞서 말했듯 '지극히 개인적인 동기부여'는 자신이 믿는 가치를 추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주인공으로서의 '나'에 대한 탐닉에서 벗어나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자신이 믿는 가치가 무엇인지가 드러난다.

(...) 현실을 무시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스스로 부여하는 가치, 일 자체에 대한 탐구가 주는 순수한 기쁨이야말로 자유로움의 감각을 선사한다. (...) 그제야 우리는 연습의 과정에서 기쁨을 누린다.

내가 믿는 가치 : 누구에게나 잠재력이 있고 이를 키울 수 있는 환경에 있을 때 성장한다.

내가 탐구하고 싶은 영역 : 현재로선 3개일 것이다. 몰두할 때의 감각이 좋은 '글쓰기와 독서', 기술로서 활용할 수 있는 '북 디자인' 정도.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려면

등가성을 따지지 않고

내 존재의 의미를

발견해 주는 일터에서

일해야 한다.

내 존재 자체를

일의 규정에 포함해 주는

일터가 필요하다.

그런 일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없다면 우리 스스로

'무리'를 이루어

만들어낼 수는 없을까?

본문에서

일은 이들에게도 고단하고 힘겹지만 자신이 찾아낸 의미 덕에 일하는 자신을 측은히 여기지 않는다. 그 의미가 그들을 끝까지 배신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행운이 모두에게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일이 곧 나'라는 동일시에 빠져 있다면 우리는 언제 일에 배신당할지 모른ㄷ. 그렇다고 '일은 그저 돈벌이'라고 자조하며 살아간다면 행복할 리 없다. 일터의 가면을 따로 만들어 영혼 없이 일하는 것은 편리할 수 있겠지만 냉소주의의 공격을 피하기는 어렵다.

(...) 일하는 나와 살아가는 나, 돈 버는 나와 돈 쓰는 나를 나누어 살아가면서 온전히 행복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마음껏 일을 좋아할 수 있는 플랫폼이 필요한 이유다.

저자는 좋아하는 일, 또는 비생산적 딴짓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마음 맞는 사람들 간의 느슨한 연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모두가 한 표의 의결권을 갖는) 협동조합 같은 형태의 집단은 세상 속에 좌표를 찍는 일이자 자신의 쓸모를 이해받는 울타리가 될 수 있다.

밥벌이에서 돌봄 받지 못한

꿈이나 열정을

그냥 쓰레기통에

처넣지 않을 수 있는 곳을

스스로 마련하려

애쓰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 믿는다.

그렇게 비축한 힘이

다른 어떤 가능성을 불러올지

상상하면 가슴이 뛰기도 한다.

본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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