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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까북스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by 알로네 2022.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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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공저(전고운, 이석원,이다혜,이랑,박정민,김종관,백세희,한은형, 임대형)

총 9명의 저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글쓰기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야기의 흐름도, 소재도, 분위기도 제각각이지만 단 하나 공통으로 모아지는 게 있었다.

그건 바로 '쓰고 싶지 않은 마음'

 

집필 경험이 다수 있는 작가들도 흰 페이지 앞에서는 매번 막막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하소연이 세밀하게 담겨 있다.

 

 

9명의 저자가 말하는 9가지 이야기 모두 매력적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첫 번째의 전고운 님과 마지막 아홉 번째의 임대형 작가님의 문장이 기억에 남았다.

 

 

특히 전고운 님의 글이 좋았던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게으른 자신을 책망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우연히 마주한 장면을 보고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理想)에 관해 말하는 흐름. 이게 좋았던 것 같다. '작은 이야기에서 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생각', '사소한 순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사람에게서 위안 받는다'라는 고백이 좋았다.

 

그녀는 글쓰기 앞에서 또 게을러진 자신을 타박하고 있었으나 나는 그런 글이 오히려 더 인상 깊었다. 자신을 돌아보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향하면서 감정과 생각이 어떻게 확장되는지 느낄 수 있는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파고드는 글쓰기가 아니라 뻗쳐나가는 글쓰기랄까.

 

 

'글쓰기'를 주제로 하는 책의 효용도 이와 같지 않을까. 속으로 침잠하면서 쓰기를 하다 길을 잃었을 때 어떻게 미로를 빠져나올 수 있는지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깨닫게 해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는 고독한 글쓰기를 하다 유독 외로울 때면 자연스럽게 떠올릴 책이란 생각이 든다.

 

 

 

 

 

* 인상 깊은 문장들

 

 

이런 나의 생각이 문제다. 쉬운 것은 인정하지 않는 생각. 어려운 것만 진짜라고 여기는 생각. 결핍과 고통에서 빚어진 게 아닌 글들은 가치 없다고 여기는 생각.

 

 

 

어제는 많이 울고 많이 마셨다. 심지어 울면서 마시면서 짜디짠 라면도 부숴 먹었다. 나를 부숴버릴 순 없고, 현실적으로 부숴버릴 수 있는 게 라면밖에 없으니까. 왜 울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제는 지나갔고, 세상에 울 일은 널렸으니까. 짜디짠 눈물과 생라면 덕에 눈은 누가 때린 것처럼 부어 있고, 알코올에 절여진 몸은 콘크리트로 변한 듯 무거웠다.

 

울어버린 어제를 표현하면서도 쿨내가 진동하는 문장이다. '왜 울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제는 지나갔고, 세상에 울 일은 널렸으니까'라니.

 

 

 

 

새해가 됐고, 딱 두 가지 목표만 세웠다. 잠에서 깨면 30분 요가 하기, 그리고 무조건 많이 쓰기 그게 편지든 일기든 시나리오든 반성문이든 많이 쓰고 볼 것.

 

 

 

 

글과 나 사이에 차가운 강이 흐른다. 글로 가기 위해서는 그 차가운 강을 맨몸으로 건너야 한다. 입고 있던 옷을 다 벗어 두고, 신발도 벗고 헤엄쳐 가야만 글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 결코 죽지는 않는다.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만 있을 뿐이지만, 제정신으로는 누가 그 고통을 반복하고 싶을까. 그 강을 자꾸 건너는 사람들은 현실이 그 강만큼 추운 사람들이거나 고통 자체를 즐기는 특이 체질일 것이다.
예전에 그 강을 자주 건너갔던 것은 그때는 현실이 강만큼 추워서였다. 혹은 그 추위를 견뎌서라도 얻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달려 들어갔다. 지금은 그때보다 춥지 않고, 얻고 싶은 게 간절하지 않으며 그곳 말고도 갈 곳이 늘어나기도 했다.

 

 

 

 

이 말을 하기 두렵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아도 사는 데에 전혀 지장이 없다. 글 안 쓴다고 죽을 것 같지 않고, 오히려 쓰면 죽을 것 같다. 결핍을 무엇으로라도 채워서 성장한 내가 대견하지만, 애를 써서 만든 안정적인 삶에서 무슨 글이 나오겠는가. 굳이 글을 쓴다 한들 그 글이 무슨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런 나의 생각이 문제다. 쉬운 것은 인정하지 않는 생각. 어려운 것만 진짜라고 여기는 생각. 결핍과 고통에서 빚어진 게 아닌 글들은 가치 없다고 여기는 생각. 이 생각은 언제부터라고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나를 지배해 왔다.

가치 없이 느껴지니 쓰고 싶다는 욕망은 태어나지도 못하고 사라진다. 쉬운 것에 대한 경멸 자체가 일차원적인 태도다. 들여다보면 계란말이 하나 김치찌개 하나 어느 것도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데, 그 너머를 보지 않고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해 버리니 냉소적이게 된다. 냉소적이기만 했다면 그나마 좀 나았을 텐데, 나는 뜨겁기도 하고 냉소적이기도 해서 타버리거나 추위에 덜덜 떨거나 냉탕과 열탕을 왔다 갔다 하는 사이 에너지가 증발해 버렸다. 두 상태 다 난처한데 차라리 뜨거운 게 그나마 생산적이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멀리서 카트를 닦고 있는 그 사람을 발견하자마자 가슴이 아팠다. 마치 오래도록 못 본 사람을 우연히 먼저 발견한 것처럼 가슴 중앙이 아려왔다. 연휴에 아무도 관심 없을 일을 묵묵히 하고 있는 저 사람을 나만 보고 있다는 것이 쓸쓸해졌다. 사람들이 꼭 봐야 될 이야기는 대단한 장면이 아니라 이런 장면이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걸까.

소중한 것을 봐도 주류 비주류로 판단하는 나쁜 버튼이 생긴 게 몹시 성가시다.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하는 것보다 숨어 있는 작은 존재를 구하는 것이 진짜 세상을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자꾸 그런 이야기를 말하면 상업적이지 않다고들 말한다. 작은 이야기에서 큰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극장엔 점점 더 작은 이야기가 안 보이는 것 같아서 겉만 작은 내가 속까지 작아진다.

 

 

 

 

 

 

나는 결국 아무에게도 상관이 없을 이런 사소한 것을 목격하고 느끼고 생각할 때, 쓰고 싶다. 그런 순간을 만난다면 어떤 압박도 없이 지금처럼 글을 쓰게 된다.

고작 이 짧은 순간을 위해 나는 계속 그 싫은 것들을 견디고 있나 생각하면 지나치게 비실용적인 인간인가 싶지만, 어차피 행복이라는 게 비실용적이다. 누구나 찰나의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며 살듯이 나도 그러할 뿐.

 

 

 

 

 

 

나는 뚜렷한 입장을 갖고 있을 때에도 주로 말하는 쪽보다 침묵하는 쪽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하나 마나 한 말을 하느니 차라리 입을 닫고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침묵을 잘 지키는 것만으로도 소음으로 가득 찬 세계에 소음을 더 얹지 않음으로써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목소리를 내고 존재를 드러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세상은 어쩐지 더 후퇴하게 될 것만 같다.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천재적인 영감보다는 성실함과 꾸준함이다. 당연한 얘기 같지만 의외로 당연하지 않다. 작가에게 가장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가 그것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없는 근육을 만들어 유지하는 일과 같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허공의 누각을 건축해 나가면서 느꼈던 쾌감은 나로 하여금 신을 충분히 잊게 만들었다.

 

 

 

 

 

일기 쓰기를 제외한 거의 모든 글쓰기는 결국 타인에게 나를 내비치고 표현하는 행위가 아닐까. 나는 그런 글쓰기에는 이상하게 몰두하기가 어렵고 쉽게 지쳐버리고 만다. 타인에게 나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웬만하면 시나리오를 쓸 때를 대비하여 부족한 욕망을 비축해두려고 한다.

내가 예외적으로 이 청탁을 받아들인 이유는, 이 책의 지면이 쓰고 싶지 않은 마음에 대해 쓰는 것을 허락하는 거의 유일한 지면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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