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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까북스

살고 싶다는 농담, 허지웅

by 알로네 2022.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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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다는 농담

 

살고 싶다는 농담

허지웅

고백하자면, 읽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린 책이다. 친척 언니의 선물이었는데, 그녀가 편지에 써 준 대목이 마음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바로 이 문장이었다.

"위대한 너의 앞날을 응원해"

오랜 고민 끝에 퇴사를 결정하고 만나는 자리여서 였을까. 끝을 어떻게 맺어야 할지 아직 얼떨떨해하고 있는 내게 언니는 고맙게도 묵직한 문장을 건네주었다.

그렇게 감동의 눈물로 첫 대면한 책, <살고 싶다는 농담>은 허지웅 작가의 투병 기록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혈액 암의 일종인 악성림프종이란 병마와 싸우며 느낀 바를 이 책에 꾹꾹 눌러 담았다.

그가 겪은 고통을 내가 감히 짐작할 순 없지만 이 책을 읽으며 한 가지는 분명하게 전달받았다.

'자기 의지'

어떠한 불행 속에서도 사람에게는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대응하고, 싸우고, 버틸 수 있는 힘이 내재해 있음을 그는 힘주어 말하고 있었다.

길을 잃을 때마다, 무릎이 꺾일 때마다 펼쳐들고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책이다.

* 인상 깊은 문장들

형편이 좋은 집에서 태어난 청년들은 이기는 경험을 쌓는 일이 비교적 수월하다. 스스로 형편이 불리하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무엇보다 몸을 이기는 경험을 쌓아나가자. 출발선이 다르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몸을 이기는 경험을 대신 쌓는 것이다. 이기는 경험을 쌓는다는 건 언제 힘을 주고 뺐는지, 언제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는지 근육의 쓰임과 호흡의 감각을 기억해 내는 것과 같다. 지는 것에만 익숙해지면 뭐가 진짜 이기는 거고 지는 건지조차 구분이 어려워진다. 되는 놈만 늘 되는 이유가 그런 것이다. 이겨본 사람만이 다시 이길 수 있고, 지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요컨대 끝까지 버틸 수 있는 몸을 만들자는 것이다.

→ 버틸 수 있는 몸은 '이기는 근육'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와닿는다. 그 근육을 붙이는 활동 중에 당장 시작할 수 있는 게 바로 '운동'이라는 것도.

요컨대 불행의 인간관계를 선명하게 규명해 보겠다는 집착에는 아무런 요점도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그건 그저 또 다른 고통에 불과하다. 아니 어쩌면 삶의 가장 큰 고통일 것이다. (...) 끊임없이 과거를 소환하고 반추해서 기어이 자기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어낸다. 내가 가해자일 가능성은 철저하게 제거한다. 나는 언제까지나 피해자여야만 한다는 생각은 기이하다.

(...) 사람의 능력으로 특정할 수 있는 몇 가지 원인을 고치거나 없앤다고 해서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벌어질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 운명 이야기가 아니다. 충분한 원인과 조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에 결국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는 이야기다. 피할 수 없다.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결과를 감당하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있는 힘껏 노력할 뿐이다.

(...) 찾을 수 없는 원인을 찾아가며 무언가를 탓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에 수습하고, 감당하고, 다음 일을 하자. 그러면 다음에 불행과 마주했을 때 조금은 더 수월하게 수습하고, 감당하고, 다음 일을 할 수 있다.

→ 이 대목에서 문득 스토아 철학이 떠올랐다. 에픽테토스는 통제의 이분법을 말하며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은 일을 걱정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했다. 불행도 이와 같지 않을까. 나 또한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을 때 '왜'라는 의문을 품으며 지나치게 파고들곤 했는데, 이 행동은 분명 소모적이었다. 사람을 성장시키는 건 불행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한 태도와 대응이라는 걸 기억하고 싶다.

이미 벌어진 일은 벌어진 대로 잘 껴안고 살아갈 생각을 해야지 그것을 인력으로 애써 돌이킨다고 해서 처음처럼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니라는걸, 이제는 삶을 통해 잘 알고 있다.

(...) 액정보호필름을 붙이는 것과 같다. 붙이기 어렵다. 먼지가 들어가고 지문이 남는다. 그래서 지금 당장 확 떼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거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정말 망치게 된다. 미련을 버리지 못해 먼지를 빼고 지문을 지우려다 아예 구겨지고 망가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운이 좋은 아이들은 액정보호필름을 새 걸로 다시 사주는 부모가 있다. 그런 부모가 없다고 화를 내거나 아파하지 말아라. 시간 낭비다. 그냥 먼지와 지문을 참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빨리 배우면 된다. 부모가 사준 두 번째 기회를 누리는 아이들은 그런 방법을 배울 굴곡이 없다. 언젠가 알게 되겠지만, 나와 내 주변의 결점을 이해하고 인내하는 태도는 반드시 삶에서 빛을 발한다. 그걸 할 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삶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 인생 리셋 하고 싶을 때 기억하고 싶은 대목.

 

그런 경험들이 있다.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사람을 충만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나이가 들수록 크고 격정적이며 값비싼 것보다 이와 같은 경험들이 쌓였을 때 방향감각이 생기고 등이 곧게 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여기서 세 가지가 떠올랐다. 1) 엄마와 산책하며 수다 떨 때 2) 가족들과 대화하면서 함께 밥을 먹을 때 3) 조용한 곳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선한 마음으로부터 악한 행동이 나올 수 있는가. 그렇다. '공동의 선이나 대의'라는 것은 어느 언덕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역사 속 각기 다른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가장 나쁜 일들과 애국 애족의 이름으로 촉발되었던 크고 작은 전쟁은 대개 이런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네 이웃과 공동체를 해롭게 하라 가르치는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선의를 이해하되, 우리는 그 선의가 이끌 수도 있는 잘못된 결과에 대해서도 늘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피폐한 마음을 가진 자들의 가장 편안한 안식처는 늘 자조와 비관이기 마련이다. 어느덧 나는 완전무결한 피해자라는 생각 안에 안도하며 머물게 되는 것이다. 그런 자신을 구하기 위한 자력구제의 수단으로 무엇을 선택하든 늘 옳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그렇게 타락한다.

(...) 피해의식은 사람의 영혼을 그 기초부터 파괴한다. 악마는 당신을 망치기 위해 피해의식을 발명했다. 결코 잊어선 안된다.

→ 권력이 있는 사람이 피해의식에 사로잡혔다면 남을 해할 수도 있음을 닉슨을 통해 깨달은 대목이었다. 그러면서 나 자신도 돌아보았다. 자책과 비관의 늪에 자주 빠졌던 이유도 실은 가장 익숙하고 편안한 안식처였음을. 자기 연민에 잠식되지 않는 방법은 '다음을 도모하는 것'임을 잊지 말자.

자기 삶이 애틋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누구나 자신이 오해받는다고 생각한다. 사실이다. 누군가에 관한 평가는 정확한 기준과 기록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정말 불공평하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이와 같은 현실을 두고 누군가는 자신을 향한 평가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킨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죽을힘을 다해 그걸 해낸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멋지고 빼어난 것들 덕분이 아니라 언제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오래된 선행들 때문에 구원받을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영원회귀는 '동일한 것의 영원한 반복'이다. 우리가 죽으면 똑같은 인생이 다시 반복된다는 이야기다. (...) 완전히 토시 하나 바뀌지 않은 그대로가 반복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구절을 여러 번 읽고 토할 뻔했다. 우리가 과거의 인생을 반복하고 있고 그것을 다시 영원히 반복한다는 아이디어는 끔찍한 생각이다. 니체는 정확히 바로 그 공포에 맞서라고 이야기한다.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운명론적 공포를 극복하고, 반복되더라도 좋을 만큼 모든 순간에 주체적으로 최선을 다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 이토록 끔찍한 삶이라도 내 것이라고 외치라는 것이다.

(...) 삶의 가장 기쁜 순간을 반복하기 위해서라면 가장 추악한 순간마저 얼마든지 되풀이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니체는 차라투스트라가 되어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다.

"그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 이 대목에서 생각이 많아졌다. 나는 찰나의 기쁨을 위해 고통까지 껴안을 수 있을까 자문해 보면 자신이 없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기쁨과 고통을 전부 수용하라니. 그 공포에 맞서라니....! '다시 한번'이라고 자신 있게 외칠 용기가 없다는 건 기쁨의 농도가 옅어서일까 아니면 고통의 강도가 무서운 걸까.

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다. 상처를 과시할 필요도, 자기변명을 위한 핑곗거리로 삼을 이유도 없다. 다만 짊어질 뿐이다. 짊어지고 껴안고 공생하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할 뿐이다. 살아가는 내내 말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자기혐오로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 물론 사랑으로도 살 수 있겠지만 그건 여건이 되는 사람에게 허락되는 것이다.

→ 여기서 기억하고 싶은 단 하나의 단어를 꼽자면 '공생'이다. 덧붙여 설명하면, '불행과 공생하는 법'

불행이 없기를 바라지 말고 도처에 널려있음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그리고 불행과 불운에 잡아먹히지 않고 사건과 나를 분리시켜줄 수 있는 나만의 주문을 생각해 보았다. 아마 이 말이 될 것 같다.

"나에게는 언제나 선택권이 있다."

+덧. 잊지 말자. 이 문장.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한 평정심과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구별할 수 있는 밝은 눈을 갖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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