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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향해 걷는 열 걸음, 최진석

by 알로네 2022.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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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향해 걷는 열 걸음

 

 

 

나를 향해 걷는 열 걸음

 

 

나를 향해 걷는 열 걸음

최진석

인상 깊었던 문장이 너무 많아 아래 발췌 글을 쓰는 데 가장 오래 걸렸다. 흡사 필사 노동을 하는 듯 오후 내내 문장들을 블로그에 옮겼는데, 고생스럽긴 했지만 쓰면서도 밑줄 그은 부분이 인상 깊어 다시 본문에 빠지기도 했다.

 

 

이 책은 고전 도서 10권의 줄거리와 해당 작품 속의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챕터 별로 주옥같은 문장과 메시지가 있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었다.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아라.

 

 

초반에는 예전 자기 계발서에서 나오는 뻔한 조언이라 생각했다. 구체적이지 않고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만 늘어놓는 듯했다. 그럼에도 읽으면서 한 가지 질문만은 또렷해졌다. '나는 나를 향해 걷고 있는가?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열 번째 걸음까지 마치고 나서야 깨닫는다. 이 책의 의도는 바로 그 질문 자체였음을. 열 개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내게 묻는다. 내가 지나온 길, 가고 있는 길, 앞으로 갈 길에 관해 스스로 묻고 숙고하게 한다. 답이 단번에 나올 수 없는 질문들, 그래서 평생 품고 가야 할 질문들이 무엇이었는지 일깨워 준다.

 

실용적인 조언이나 해답 없이 오직 질문만으로 스스로 삶의 방향을 가늠하게 만드는 책이란 생각이 든다.

 

 

 

* 목차

 

 

 

 

 

*인상 깊은 문장들

1. 첫 번째 걸음 <돈키호테>

수용자를 벗어나 생산자가 되려면 누군 각 내놓은 결과를 받아들이기만 할 게 아니라 내가 그 원초적 영혼과 용기를 회복해야 합니다. 저는 <돈키호테>를 읽으면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느꼈지요.

(...) 돈키호테가 우리에게 그 말을 하려던 것 같아요. "이미 정해진 것, 다른 사람들이 다 좋다고 하는 것, 이런 것에 빠지지 마라. 거기에 너는 없다. 너는 어디에 있느냐? 바로 너의 덕, 어머니의 젖을 빨던 그 영혼에 있다. 그것을 회복할 때 비로소 너 스스로의 모험이 가능해진다."

 

 

돈키호테는 온갖 역경을 겪으면서 산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산초야, 행운은 빼앗을 수 있을지 몰라도 노력과 용기는 빼앗지 못할 것이다."

 

(...) 저는 산초의 말이 기억에 남는군요. "스스로 주인이 되어라. 자신을 섬겨라. 모험을 해라. 질문을 해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문장 하나를 발견했지요. "우선 쭈그러진 심장부터 쫙 펴십시오"

전전긍긍하고 노심초사하는 것, 계산속에 빠져 모험하지 않는 것, 손에 닿지 않는 것은 일찍이 포기해버리는 것,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은 엄두도 내지 않는 것.

이 모든 일이 우리가 쭈그러진 심장을 가진 탓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모두 쭈그러진 심장부터 쫙 펼 수 있으면 좋겠네요.

 

 

황홀경은 정체되 현재의 상태에서 다른 곳으로 건너가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신의 선물이다. 건너가는 자는 아직 명료하게 해석되지 않은 것이 주는 공포와 위험을 무릅쓰지 않을 수 없다. 존재론적 의미에서 모험은 인간이 쌓는 위대한 탑의 첫 번째 벽돌이다. 돈키호테는 그렇게 첫 벽돌을 움켜쥐고 일반화된 자신을 넘어서서 고유하고도 특별한 각성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 높은 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위 사람들은 모두 그를 미쳤다고 했다.

 

 

 

책으로 단련한 지적 탄력이 가장 강하다. 책을 읽는 양이 많아지고 지적 탄력이 커지면 경계를 넘고 다시 또 넘고 하다가 황홀경에 빠져 미친다. 결국 자신만의 세계로 진입해 고유한 영토를 갖게 된다. 핵심은 주위 시선이나 박수와 평가 등을 과감히 무시하고 자신만의 세계로 스스로를 유폐시키는 일이다.

 

 

→ 이 챕터에서 말하려고 하는 핵심 가치는 '모험'이었다. 불가능에 도전하는 행위 그 자체. 모험이 가능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역시나 '나 자신을 아는 것'이었다.읽으며 나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스스로 모험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곰곰 생각하다 문득 '글쓰기'가 생각났다. 시시하지만 분명하다. 조금씩이나마 무엇이라도 자주 끄적이려 했던 순간이 나의 자발적 모험이었다. 당장 어떤 결과물을 기대할 수도 없는데 몰입하는 분위기가 좋아 지속했고 쓰면서 밖을 향했던 시선을 내 안으로 조금씩 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2. 두 번째 걸음 <어린 왕자>

저는 어린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니체입니다. 그는 인간 정신 발달의 단계를 낙타, 사자, 어린이에 비유했습니다. 낙타는 온갖 짐을 지고 정해진 궤도를 따라 꾸역 꾸역 갑니다. 사자는 낙타에 비해 나름의 주도권과 의지를 갖고 나아가지요. 어린이는 자기가 삶의 동력 그 자체입니다. 무한 긍정의 상태지요. 정해진 궤도를 따라서도 넘어서도 갈 수 있는 존재. 어린이는 매사에 호기심이 넘칩니다. 낙타나 사자에게 없는 것이지요.

 

(...) 모험하는 마음은 질문하는 마음이고, 건너가는 마음이고, 어린이의 마음입니다. 순수한 사람만이 호기심을 갖고 질문할 수 있지요. 그리고 질문하는 사람만이 모험할 수 있습니다. 호기심이 없는 사람은 대답만 하고 판단만 합니다. 이런 사람은 안전을 추구해 모험을 할 수 없지요.

 

 

중국 명나라 말기 사상가인 이탁오는 탁월해지려면 반드시 '동심'을 회복해야 한다고 했다. 동심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처음 갖는 마음으로 모든 거짓으로부터 자유로운 순진무구한 상태다. 이탁오에게 어린이는 사람의 처음이고, 동심은 마음의 처음이다. 동심은 모든 제약과 굴레를 벗어나 전혀 새로운 곳으로 건너가게 한다.

 

(...) 낙타처럼 정해진 궤도를 따르지 않고 스스로 도는 어린이에게는 새로운 출발과 최초의 움직임을 가맹하는 순수한 충동이 저장되어 있다. 이 충동은 온전히 자신 안에서 솟아나는 것을 해보려는 새로운 동작이다. 그러므로 어린이의 심장은 모험의 박동으로 쿵쿵 뛴다.

 

(...)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가 어딘가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인 것처럼, 사람도 소명으로 키워나갈 나만의 호기심을 품고 있어야 아름다울 수 있다. (...) 어린이는 자신만의 샘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듯 오랜 시간을 들여 그것을 찾는다. 그리고 결국은 그것을 중요한 것, 자신에게 유일한 것으로 창조해 내고 만다. 자기만의 별을 기어이 찾아 갖는다.

 

→ 이 챕터에서 말하려고 하는 핵심 가치는 '소명'이 아닐까. 어린이의 동심(호기심)을 지니고 자기만의 별을 찾을 찾으라는 것. 고전서에서 철학적 메시지를 찾아내 설명하는 책이라서 그런지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개념들이 많이 나온다. 모두 받아들이는 데엔 한계가 있었지만 니체의 정신 발달 단계 비유는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나는 낙타에서 사자의 단계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음을 자각했다.

 

 

 

 

3. 세 번째 걸음 <페스트>

이 소설 속에는 카뮈가 처한 상황과 삶에서의 깨달음이 많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저는 소설과 작가를 연관 지어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면 먼저 쓰고 싶은 글과 꼭 닮은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수준의 삶을 사느냐가 어떤 수준의 글이 나올지를 결정합니다.

 

(...) 철학을 공부했다는 것은 수준 높은 사유와 치밀한 시각을 훈련받았다는 뜻입니다. 저는 노벨상을 받을 정도로 수준 높은 카뮈의 글쓰기는 역사적 사실을 철학적으로 포착해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것이지요.

 

 

 

카뮈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지금 페스트를 쓰지만 사실은 다른 어느 것을 쓰기 위해 페스트를 도구로 사용한 거야. 다른 어떤 것을 표현하기 위해 페스트를 빗댄 거야.' 우리는 이 같은 수사를 은유라고 하고, 이렇게 쓰인 글을 문학이라고 합니다.

 

(...) 논픽션은 사실을 정면으로 표현하고, 픽션은 진실을 다르게 빗대어 표현합니다. 우리는 왜 픽션을 사용할까요? (...) 은유와 추상처럼 픽션의 기법으로 접촉하는 진실은 훨씬 넓고 깊으며 생동감 있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요.

 

 

 

페스트로 비유된 이 전쟁은 결별, 감옥, 엉뚱한 부조리에 갇힌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일, 예상하지 못한 일, 바닥이 보이지 않는 절망,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곤혹, 이런 것들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상태요.

(...) 우리 인생에 빗대면 페스트는 특정 관념에 지배당하는 것, 정해진 마음에 갇히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에 페스트가 있을 때 우린 뭘 해야 할까요? 긴장하고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 치료제는 '긴장'입니다. 다음은 '지적 태도'고요. (...) 정해진 마음에 갇혀 있는 사람은 소유적 태도로 이 세상을 자기 뜻대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반면 이와는 다른 '존재적 태도'가 있습니다. 정해진 마음 없이 세계를 자세히 보는 태도를 말합니다.

(...) 페스트와 싸우려면 이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탁월하다고 생각한 일을 본분으로 삼아 책임지고 지속하려는 태도요.

 

 

 

카뮈는 이 부조리한 세상에 갇히지 않고 자기의 행복, 사랑, 자유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자 했습니다. 페스트 같은 것들이 닥쳐와 행복과 자유를 잃더라도 의지를 갖고 긴장을 풀지 않으면 투쟁을 통해 결국 다시 그것을 찾을 수 있다.

 

 

 

세계나 인간이나 모두 부조리를 가 지닌다. 부조리하다는 것은 얼토당토않거나 이해하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 악한 사람이 꼭 벌을 받는 것도 아니고, 선한 사람이 꼭 복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부조리한 세계에 인간은 던져져있는 것이지요. 문제는 그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자기로 완성될 것이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입니다.

 

(...) 삶의 요점은 부조리한 내가 부조리한 세계와 투쟁해서 어떻게 자기만의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행복과 사랑을 만들어내는가입니다.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 우리 각자는 모두 페스트를 지니고 스스로 유폐되어 죽어간다. 나를 꼭 가둔 채 그 무엇도 정해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로 건너가지 못하게 내 발목을 잡는 것은 모두 페스트다.

정해진 마음, 정치적 진영, 종교적 독선, 편견과 고정관념 등등이 또 다른 페스트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이런 것들을 넘어 어디론가 건너가는 활동력을 회복해 자유를 누리는 것이 페스트에 맞서는 인간의 투쟁이다. 인간으로 존재하려는 자들이 갖춰야 하는 자격이다.

 

→ 나에게 페스트는 나에 대한 불신이라고 생각한다. 성취와 실패를 모두 겪으면서도 늘 실패에만 초점을 두어 자책과 후회를 거듭했던 과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를 믿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오래 망설였다.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있었을 땐 두렵기까지 했다. 아마 이런 나약한 마음은 평생 옆에 두고 단련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안도할 만한 것은 내 안에 어떤 페스트가 자리했는지 스스로 자각하고 있음이 아닐까. 내 발목을 잡는 건 밖이 아니라 안에 있음을 알고 행동하는 것이 아닐까.

 

 

 

 

4. 네 번째 걸음 <데미안>

우리는 행복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이미 존재하는 행복이라는 이미지, 관념에 자기를 끼워 맞추려고 하지요. 다시 말해, 자기만의 행복을 생산하려는 존재가 아니라 정해진 행복에 다가가려고 애쓰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 <데미안>에서도 '행복을 창조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라는 주제가 일관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 스스로 원하는 사람이 된 자는 질문하는 자이고, 스스로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한 자는 대답하는 자입니다. 이 세계는 질문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질문의 결과이지요. 대답의 결과로 존재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향해 아가는 길, 그 길에 대해 숙고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해서 이 책을 골랐습니다.

 

 

 

 

<데미안>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 일보다 더 하기 싫은 일은 없다" 자기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 일이 왜 힘든 걸까요?

(...) 자기를 이겨야 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숙고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힘들고 두렵기 때문에 하기 싫은 것이지요.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보다 생산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하고 싶은 것은 항상 어디론가 넘어가려는 충동과 함께 합니다. 하지만 넘어가려는 그곳은 해석되지 않고, 드러나지 않고, 음산하고 이상해요. 그래서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항상 불안이 개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식들에게 하고 싶은 것은 나중에 이야기하고, 해야 하는 것부터 이야기하는 까닭도 그렇습니다. 해야 하는 것을 먼저 하는 게 안전하니까요..

 

Q. 그런데 우리가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대부분 돈이 많이 들잖아요.

 

하고 싶은 것에 많은 비용이 든다면 돈을 벌면 됩니다. 혹은 지금의 경제적 조건에 맞출 수도 있고요. 다만, '그것이 금지된 것인가 허용된 것인가'에 대한 숙고가 있어야 하지요. (...)'허용된 것을 하고 금지된 것을 하지 마라'가 숙고의 결론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정해진 것과 정해지지 않은 것, 허용된 것과 허용되지 않은 것, 금지된 것과 금지되지 않은 것에 대해 숙고해야 합니다. 그렇게 계속 숙고하다 보면 자기 행위와 자기 정당성, 자기의 규율이 마치 폭탄이 폭발하듯이 등장합니다. 그게 바로 '나'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숙고하지 않고, 불현듯 나타나는 그것을 귀하게 여길 줄 모릅니다.

 

 

 

 

Q.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 심사숙고하는 게 독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 생각은 항상 다음을 도모하고, 어떤 목표나 목적을 향해서 계속 나아갑니다. 다음을 갈망하는 의식의 집중적 활동, 이것을 생각이라고 할 수 있지요.

(...) 자기가 어떤 문제를 발견해서 그 문제와 투쟁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시면 생각의 효율성이 더 높아질 겁니다.

 

 

 

<데미안> 속 싱클레어도 밝고 환한 세계에서만 살던 자신이 불편하고 답답했을 겁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통해 균열을 낸 것이지.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면 안락한 유년기를 보냈을 텐데 싱클레어는 균열을 내서 온갖 방황을 겪습니다.

(...) 우리는 이 편안함이 인간으로 살다 가는 과정에서 자기를 얼마나 작게 만드는지 알아 학, 이것을 벗어나서 힘들게 건너가기를 계속한 사람들이 이 세계를 얼마나 넓고 깊고 높게 경험하다 가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안락하고 풍요로운 살이냐, 가난하고 비루한 삶이냐의 대비를 여기에서 의미가 벗어요. 우리는 지금 인간의 크기와 깊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 챕터는 한창 퇴사를 고민할 시점에 읽어서 그런지 한 줄 한 줄 회사로부터 독립을 독려하는 것처럼 해석되었다. 물론 이 편의 핵심 메시지는 이렇게 좁진 않을 것이다. <데미안>과 데미안의 의미를 해석하는 이 책은 현실적 문제들과 이상적 삶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 방향을 넌지시 알려줄 수 있는 도구란 생각이 들었다. 나의 선택에 자신이 없을 때, 익숙한 길이 안전해 보일 때 읽고 또 읽으며 자주 숙고하고 싶은 문장들이 가득했다.

* 기억할 개념들

  • 감각적 만족(즉각적 만족감) VS 이성적 사유 거친 만족(사유와 자율적 규율 지켰을 때 오는 자유와 만족)
  • 대답하는 자(수용자, 소비자) VS 질문하는 자(창조자)
  • 잡념(그냥 떠오름) VS 생각(다음을 도모하게 함)
  • 편안한 삶(현실 안주) VS 건너가기(한계에 투쟁)
  • 바람직한 것(사회적으로 정해짐) VS 바라는 것(오랜 숙고 통해 얻어지는 것)

 

 

 

 

5. 다섯 번째 걸음 <노인과 바다>

오롯한 자기로 존재하는 사람은 모든 질문이 자기에게 집중되기 때문에 신세타령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지요. 산티아고 할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섯 번이나 쉬어야 할 만큼 지쳐 있지만 그 어떤 불만족, 서운함, 좌절감도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자기의 길을 가는 그를 보면서 저는 굉장히 크고 장엄한 산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현재 장비로 80킬로그램짜리 물고기를 잡고도 3일 동안 손을 오므리지 못했다고 하는데 산티아고 할아버지의 노고는 정말 어마어마한 것이었겠지요. 소설 속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매일매일은 새로운 날이지. 운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만 나는 오히려 정확하게 할 테다." 어떤 책에는 "우선 지금 하려는 일에 집중하겠어"라고 번역되어 있어요. 기회를 잡으려면 그 기회를 잡을 능력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려면 딱 한 가지밖에 없어요. 하루하루 새로운 날인 것처럼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해야 해요.

 

 

열심히 해야겠다는 결심은 지금 걷고 있는 그 길이 온전히 자기의 길이라는 확신이 없을 때 하게 되는 것이지요. <노인과 바다>에는 산티아고 할아버지가 '나는 좀 더 성실해야 해. 열심히 해야 해. 게으르면 안 돼' 하며 다짐하는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어부라는 직업이 곧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말려도 가는 길이지요. 외로워도 가는 길, 늙어도 가는 길, 큰 상어들과 전투를 치르고 난 후에도 가야 할 길입니다. 열심히 해야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들은 그 전투와 여정에서 많이 흔들립니다.

 

 

보통의 어부가 84일 동안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한다면 우선 스스로에게 망신이다. 그러나 산티아고 할아버지는 조건과 환경을 탓하지 않듯이 자기도 탓하지 않는다. 몇 번이나 체면을 구긴 경험을 뒤로하고 마침내 자기의 공을 크게 세운 사람을 만나면, 그 공을 이루게 한 가장 근본적인 힘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진다.

산티아고 할아버지에게는 그것이 무엇일까? 나는 한 문장을 발견했다. "내일은 멋진 날이 되겠구나." 인생을 아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이런 자들은 묵묵히 자기를 향해 걷는 자들이면서, 자기를 책망하는 대신에 모든 사람이 떠나가더라도 끝까지 혼자 남아 자기를 사랑하고 지킨다.

 

 

"매일매일은 새로운 날이지. 운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만. 우선은 지금 하려는 일에 집중하겠어. 그러면 운이 찾아왔을 때 준비가 되어 있을 테니." 운은 자기에게 진실한 사람에게만 오는 선물이다.

→ 나의 일이 곧 나 자신이기 때문에 의지를 다잡지 않아도 최선을 다하는 산티아고 할아버지가 참 숭고해 보였다. 완전한 집념을 잘게 쪼개면 결국 '오늘 해야 할 일'이 된다는 것도 인상 깊었다. 나 자신을 믿고 하루하루 새로운 날처럼 오늘 할 일에 집중하라. <노인과 바다>의 핵심 메시지는 이것이었다.

 

 

 

 

6. 여섯 번째 걸음 <동물농장>

<동물농장>은 혁명의 깃발이 어떻게 완장이 되는지, 자유를 추구했던 혁명이 어떻게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로 변질되는지를 보여주고 있잖아요. 그러한 위기를 초래하는 원인은 무지입니다. 무지하다는 것은 지식이 없고 지혜가 없다는 뜻이에요. 지식과 지혜의 기본은 읽기와 쓰기입니다.

(...) 돼지들이 권력을 가진 것은 읽고 쓸 줄 아는 능력 때문입니다. 사태에 대한 인식 능력, 해석 능력,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능력이 힘의 원천이에요. 이 원천을 가진 돼지들과 그렇지 못한 동물들 사이에 지배-피지배의 구조가 형성되지요. 모든 독재, 억압, 전체주의는 대중의 무지와 함께합니다. 대중이 지적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전체주의는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어요.

 

 

 

Q. <동물농장>의 배경은 메이너 농장입니다. 왜 이곳에서 사건이 일어났을까요?

 

농장 주인 존즈 씨가 스스로 무너졌기 때문이에요. 유능한 농사꾼이었던 그가 소송에서 지는 바람에 매일 술타령만 합니다. 일꾼들은 게으름 피우며 주인을 속이고, 밭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축사 지붕은 헐고, 울타리는 아무도 손보지 않고, 동물들에게는 먹을 것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존즈 씨가 스스로 무너져서 늙은 수퇘지 메이저가 다른 동물들을 설득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 것이지요. 누구도 다른 사람을 망하게 할 수 없어요. 모든 존재는 스스로 망하는 것입니다. 국가도, 정권도, 기업도 스스로 무너지지요.

 

 

독재자들은 대개 앞선 영웅들로부터 그 정신이 아니라 이미지만 끌어와서 임의로 소비하다가 결국 특권 의식과 권력 놀이에 빠져 완장으로 전락한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된다." 그렇게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깨어 있는 것입니다. <동물농장>에서 동물들은 인간이라는 독재자를 내쫓고 자기들이 농장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농장에는 인간과 똑같은 독재자가 나타납니다. 나폴레옹이나 스퀼러 같은 돼지들은 두 발로 걷고, 맥주를 마시고, 침대에서 자며 인간과 똑같이 행동합니다. 니체의 표현대로라면 동물들이 인간과 싸우다가 깨어나지 못해서 결국 인간처럼 된 것입니다.

(...) 조지 오웰은 우리에게 괴물과 싸우던 동물들이 그 싸움 속에서 다시 괴물이 되는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 반란이 어떻게 독재로 변질되는지 동물농장의 이야기로 설명하고 있었다. 인간과 싸우려 했으나 결국 인관과 닮게 된 돼지를 보면서 깨어있지 않으면 누구든 권력에 쉽게 취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깨어있기 위해서는 읽고 쓰기, 즉 맹목적인 수용과 헌신이 아니라 사유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도.

 

 

 

 

 

7. 일곱 번째 걸음 <걸리버 여행기>

자기를 만나게 해주는 일에는 책 읽기, 글쓰기, 운동하기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제일 짜릿하게 자기를 만나게 해주는 일은 여행입니다. 여행은 무엇을 보러 가는 게 아니에요. 자기와 상관없는 곳에 자기를 데려다 놓고 스스로를 생경하게 만드는 겁니다. 자기를 생경한 곳에 옮겨 놓으면 어떻게 될까요? 비로소 자기에게 드러난 적이 없는 자기를 만나게 되는 거지요.

(...) 익숙함 속에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기를 바라보기란 쉽지 않아요. 제가 <걸리버 여행기>를 선택한 이유도 걸리버라는 사람이 여행을 하면서 자기를 만나는 과정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조너선 스위프트의 건너가려는, 여행하려는 강한 기질과 엄청난 양의 지식, 그리고 조국에 대한 사랑과 사명감. 이 세 가지가 아주 높은 수준으로 합쳐져 나온 소설이 바로 <걸리버 여행기>인 것입니다.

 

 

 

저는 사람이 제대로 살거나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으면 두 가지 문장을 반드시 뼛속 깊이 새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이 세계는 항상 변화한다.'라는 거예요. 고집부리지 말고 그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합니다. (...) 그다음으로 '우리는 금방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요. (...) 영원히 죽지 않고 살면 무엇이 없어질까요? 호기심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질문이 없어져요. 삶의 긴장감을 최고로 증폭시키는 것이 죽음이에요.

 

 

 

궁금증을 크게 가진 여행자들은 인생에서 종종 낙오한다. (...) 인생에서 준비된 낙오는 얼마나 빛나는 일인가. 고작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인생이라면, 무성영화 속의 조연이나 그들 가운데 한 명 이상이 되기 어렵다.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죽을힘을 다해 본선 쪽"으로 노를 저었던 모든 성실한 자들은 낙오해야만 얻어지는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삶의 성취를 맛보기 어려울 것이다.

 

(...) 어딘가로 떠나서 자기를 낯설게 하려는 인위적 활동은 그것 자체가 편안히 쉬고 싶은 감각과 출발 직전의 불안을 극복한 매우 지적인 활동이 아니겠는가.

 

→ 흥미로웠던 건 책을 읽으며 내가 품고 있는 문제에 자주 대입해 보았다는 것이다. 첫 번째 걸음에서 <돈키호테>를 읽을 땐 퇴사를 고민했다면, 이 챕터에선 (퇴사를 결정한 후에 읽어서 그런지) 우습게도 나와 걸리버를 동일시하며 읽었다. 어쩌면 '스스로 대오를 이탈한 걸리버'가 되고 싶은 허영일 수 있지만 성장하고 있다는 감각을 전혀 느낄 수 없는 환경을 벗어나기로 선택한 것에는 후회하지 않는다. 위의 문장대로 새로운 세계로의 출발 직전 엄청난 불안을 느꼈고 게으른 내 모습에 자주 자책하지만 그럼에도 흔들리는 대로 여행하고 싶다. <걸리버 여행기>의 작품 해석을 읽으며 그런 용기를 얻었다.

 

 

* 각 나라 별 특성 요약

  • 소인국 : 법률에 의거해 행정 집행. 사기범을 엄하게 다스림 → 지적 수준이 높고 숙고할 줄 안다.
  • 거인국 : 정치를 학문으로 만들지 않음(지적 체계無), 감정/양심에 의존하고 진영에 갇히기 쉬움, 정의 & 자유 등 고차원적인 추상을 추구하지 않음. → 생각하는 능력 없음. 무용한 것을 유용하게 볼 줄 모름.
  • 라퓨타 : 정해진 생각만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음. 문제를 발견하는 게 아니라 이론만 관찰 → 생각하는 능력 부족한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에는 관심이 많음.
  • 럭낵 : 죽지 않는 나라. 죽음이 없어서 호기심도 질문도 없음.
  • 후이늠 : 말들의 나라. 자연의 완성. 여행의 최종 목적지. (설명이 다소 부족한데..)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삶으로 가야 한다는 걸 걸리버가 깨닫게 된 계기가 됨.

 

 

 

 

8. 여덟 번째 걸음 <이솝 우화>

누구나 이정표가 없는 곳에서는 요동치고 떨린다. 요동치고 떨려보라. 자기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화란 이런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앉혀놓고 왜 거짓말을 하면 안 되는지 그 이유에 대해 조목조목 말한다고 해서 거짓말하는 버릇이 고쳐지지 않아요. <피노키오>를 한번 읽게 하면 거짓말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크지요. 다시 말해서, 거짓말하지 말라는 논증과 논변으로 구성된 주장보다 이야기가 주는 영향력이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 어떤 대상을 표현할 때, 그 대상을 정면으로 놓고 조목조목 설명하는 것보다 옆에서 비틀어서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 있다는 뜻입니다.

 

(...) 논증, 논변에는 공격과 방어가 있어요. 내 논문의 치밀함이 공격받으면 나는 바로 방어해야 해요. 반면에 이야기는 여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듣는 사람이 빈 공간으로 들어올 수 있어요. 바로 이때 공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 우화, 즉 이야기한다는 것은 자기주장에 공간을 허용한다는 것입니다. 여백을 허용하고 그 공간 속으로 상대방을 초청하는 일이지요.

 

 

철학이나 천문학, 수학 같은 것들은 일상과 굉장히 거리가 있어 보여요. (...) 그것들은 일상의 구체적인 일들을 하나하나 처리하는 데에는 효과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큰 틀에서 전체적으로 이것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일상에 필요 없는 것이 인간을 더 높은 경지로 올려주는 것이지요.

 

 

자주 이야기하고 들으면 사람은 커진다. 자기를 향해 걷는 자는 클 수밖에 없다. 이야기하는 자, 질문하는 자, 생산하는 자, 지도하는 자들은 모두 자기를 향해 걷는다.

 

(...) 새끼를 고작 한 마리밖에 못 낳는다며 여우가 면박을 주자 암사자가 조용히 한마디 한다. "한 마리이긴 하지. 하지만 사자야"

 

→ 논증보다 이야기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는 주장과 근거를 기억하고 싶다. 이야기하는 것. 생산하는 것. 이를 내 삶에 대입해 본다면, '글을 쓰는 연습'일 것이다. 일기로라도 나의 하루를 기록하고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해 보는 것. 나를 향해 걷는 첫 단계임이 분명하다.

 

 

 

 

9. 아홉 번째 걸음 <아Q정전>

지금까지 자기를 섬기는 삶에 대해서 살펴봤으면, 이제는 자기를 섬기지 않는 자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를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Q정전>을 골랐습니다. 자기를 섬기지 않는 인간이 소용돌이치는 역사 속에서 얼마나 엉망진창이 되는지, 얼마나 초라해지는지를 확인할 수 있어요.

 

루쉰은 <아Q정전>에서 사람들이 빠져 있는 정신 승리법을 이야기합니다. 정신 승리법이란 과학적이지 않고 심리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소해버리는 겁니다. 자기가 굴욕을 당했을 때도 '나에게 굴욕감을 주는 저 사람이 나쁜 거야. 나는 착한 사람이야. 그래서 이건 굴욕이 아니야'라고 생각해버리지요.

 

사람들은 왜 정신 승리에 빠질까요? 우리는 심리적으로 편안한 것을 행복으로 착각하곤 합니다. 눕고 싶을 때 눕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이런 심리적인 편안함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요. 그런데 이것은 행복이 아니라 심리적 안일함입니다. 행복은 자기 존재를 얼마나 확장시키고 얼마나 독립적으로 유지하는지와 같은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 사람은 눕고 싶어도 눕지 않는 데서 그 '인간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심리적 편안함을 행복이라고 안일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자기 존재에 대해 철저히 물을 때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아Q가 되지 않으려면 자기 자신과 진실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자기가 바라는 것을 가져야 해요. 간절한 바람은 각성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그러한 각성과 함께 고요를 경험하고, 그 고요 속에서 솟아나는 소명을 잡아야 합니다.

 

(...) 바람은 그 사람의 여러 가지 조건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그 어떤 것이라도 자기가 각성에서 나오는 바람은 절대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각성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으면 아Q처럼 됩니다.

 

 

 

Q. 우리는 왜 생각하기 싫어하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을까요?

 

게을러서 그렇습니다. 생각하는 것은 힘든 일인데 사람은 수고로운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아요. 수고로운 일을 하는 경우는 그 일을 했을 때 더 큰 이익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뿐이지요. 여기서 큰 이익은 무엇일까요? 소명을 완수하는 일, 큰돈을 버는 일, 더 큰 영향력을 갖는 일입니다.

 

(...) 자기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사색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아요. 어떤 행복도 오지 않습니다.

 

 

생각은 자기를 벗어나려는 충동인 호기심이 동작하는 한 형태이므로 반드시 앞을 향한다. 생각이 없으면 지난 일을 파먹는 데 골몰한다. (과거 일에 집착)

 

(...) 아Q는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자신도 몰랐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는가? 지금 우리는 아Q가 아닌가? 우리가 무엇을 바라는지 우리는 아는가? 무엇인가를 바라는 주체가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을 향해 걷는 사람만 기꺼이 무엇을 바라는지 안다. 자기를 향해 걸을 줄 모르고, 자기가 누구인지 물을 줄 모른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아Q다.

 

→ 아Q정전의 작품 해석을 읽으면서 나 또한 오랜 기간 아Q로 살아왔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남들의 생각, 사회가 요구하는 생각을 답습하는 게 가장 쉬웠으니까. 하지만 내면에서 나오는 질문을 계속 무시할 순 없었다. 나는 현재 나를 향해 걷고 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아직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아Q처럼 현실의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과거만 파먹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게 늘 긴장해야 할 것이다.

 

 

 

 

10. 열 번째 걸음 <징비록>

자기를 섬기지 않는 삶을 살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인생이 어떻게 엉망진창이 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아Q정전>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 사회가 어떻게 되는지를 공유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징비록>을 뽑아봤습니다.

 

 

 

생각하는 능력이 있으면 잘못한 후에 그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마음을 써서 반성한다. 생각하는 능력이 없으면 마음을 써서 반성하지 못하므로 잘못을 반복한다. 반성한 후에 남긴 기록물은 귀하다. 생각하는 능력을 갖추게 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환란을 겪었는가 보다 환란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는가가 더 중요하다.

 

 

내 모습이 자기가 원하던 모습이 아니면 자기에게 화를 낼 줄 알아야 합니다.

잘못된 일을 경계해서 다시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을 징비라고 합니다.

 

(...) 분노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해요. 이 세계의 모든 창의적인 활동은 불편함과 문제를 해결한 결과지요. 여기서 이 불편함과 문제가 상처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동기가 분노인 것입니다.

 

 

 

전란을 당한다는 것은 곧 나라의 힘이 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힘이 약해지는 이유로 맹목적 평화주의가 있지요. (...) 긴장 속에서 위기를 대비하지 않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그 상태에 그냥 빠져 있는 도덕적 경향을 말합니다.

1392년에 조선이 세워지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기까지 200년 동안 조선에는 큰 전쟁이 없었어요. 그래서 전쟁에 대비하지도 않았지요.

 

 

제일 부강했던 세종 때는 파견 횟수가 굉장히 많았는데 선조 시기에는 거의 없어요. 일본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 적절히 견제할 수도 없는 것이지요.

(...) 사람들은 힘을 행사하지 않는 상태, 이것을 평화로 착각하고는 합니다. 그런데 평화는 강력한 힘으로 지키려고 애써야만 유지될 수 있는 거예요.(...) 평화를 이루려면 그 침략에 대항할 힘을 갖춰야 한단 뜻이에요.

 

유성룡은 <징비록>에 제대로 된 나라, 침략을 허용하지 않는 나라가 되기 위해 지켜야 할 몇 가지를 써놓았습니다. 먼저 "국제 정세에 대해 기민하게 이해하라" (...) 어떤 주체든 자기 바깥의 세계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긴장을 놓지 않은 채 부지런히 생각해야 합니다.

(...) 다음으로 "국무의 기간을 유지하라.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하라. 공적에 따라 공평하게 상을 줘라."

 

 

 

전란 당시 우리에게는 그래도 이순신이 있었다. 이순신은 정해진 생각에 갇히지 않고, 그 벽을 넘어서는 사고력을 가지고 있었다. "경상 우수사 원균과 좌주사 박홍은 왜선의 규모만 보고 지레 겁을 먹고, 우리 군의 화력과 우수한 선박 운용법은 활용해 보지도 않은 채 배와 무기를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순신은 "조총의 사거리가 함포에 비해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판옥선에는 함포를 탑재할 수 있다는 결정적인 장점에 주목했다. 그리하여 이순신은 불패 신화를 창조해낼 수 있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나이다"라는 비장한 명언은 단순히 심리적이거나 의지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 뒤에는 함포와 판옥선이라는 산업적이고 기술적인 성취가 버티고 있었고, 그 성취를 관찰하는 사고력이 있었다.

 

→ 의외였다. 마지막 챕터 내용이 조선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인 <징비록>일 줄이야. 마지막 <아Q정전>과 <징비록>의 작품 해석이 없었다면 자신을 향해가는 건 외골수처럼 스스로에게만 파고드는 일이라 착각할 뻔했다. 끝에 두 개의 작품 덕에 사유의 시선이 안과 밖을 모두 향해 있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세상 돌아가는 안목과 나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자신을 함양하는 방법이지 않을까. (징비록이란 책.. 한 번 도전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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